크리에이티브의 길을 묻다
김혜경 2
김병희 (서원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 kimthomas@hanmail.net) 출처 : 광고정보 | 사진 박정훈

진솔한 이야기 만들기

김혜경이 생각하는 광고 창의성의 개념은 ‘진솔한 이야기 만들기’이다. 괜히 멋있게 포장하고 이상하게 기교부린 메시지가 아니라, 겉치레를 없애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찾아내 진솔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광고 창의성의 진면목이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상품을 대하고 소비자를 대하는 순간에 생명력이 오래가는 솔직한 상품의 드라마가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 광고계 사람들은 대개 ‘새 것’ 콤플렉스에 빠져있는 듯하다. 남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을 해석하는 것이 광고 창작자들의 본업이라 이런 경향은 크게 탓할 바는 못 된다. 하지만 김혜경이 때로는 유행을 좇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다고 강조한 점도 크게 탓할 바가 못 된다. 늘 새것만을 추구하는 것 역시 남들도 다 하는 방법이라 구태의연한 스테레오타입일 텐데, 이런 때 유행에서 벗어나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것도 다른 의미의 새로움일 테니까. 유행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초창기에 보냈던 시간의 모래밭에서 그가 건져 올린 소중한 조약돌인 듯하다.

남들은 다 새것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상황에서 유행을 좇지 않으면 뒤떨어질 수도 있을 텐데요.

글쎄요. 옛날 누리기획에서 7년 정도 있었어요. 그때 사장님이 독특한 분이셔서 제가 한국의 절이라는 절은 거의 다 다녀봤어요. 당시 누리기획의 염사장님은 별명이 ‘염 도사’였는데, 광고를 일종의 삶이라고 생각하셨어요. 미술에 조예가 깊고 점도 봐주고 그래서 저희가 도사라고 불렀는데, 그분은 광고를 판매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사람들의 삶을 알아야 된다.” “한국적인 것을 모르고 어떻게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라시며 한국의 정신이랄까 이런 것들을 좋아하셨죠. 저한테는 너무 좋은 시기였어요. 어떻게 보면 한창 뛰어야 할 때 저는 딴 짓을 하고 있었거든요. 남들은 이 광고 저 광고 만들고 난리인데 저만 정체된 듯해서 그 당시에는 뒤쳐졌다고 생각했었죠. 광고 기법 같은 것은 전혀 안 배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많이 배운 시기였어요. 어떻게 보면 광고인은 괜찮은 광고 하나 남기면 잘하는 것이잖아요. 나중에 다른 회사로 옮겨 SK텔레콤의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광고를 했어요. 저는 그 광고가 누리기획의 자양분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정신적인 자양분 말고 실제 광고일은 누구에게 가장 많이 배웠는지요?
여러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지만 일당백이셨던 리젠시의 이재덕 사장님을 만나 특히 많이 배웠어요. 디자이너인데도 기획, 조사, 마케팅 등 모르는 분야가 없는 분이셨죠. 아직 그런 분을 못 봤어요. 그분이 얼마나 닦달을 했는지 1~2년 정도를 정말 피나게 배웠죠.

 SK텔레콤 광고를 주로 맡아서 하셨었나요?
그때 011, 016, 019 해서 통신사들이 다 잘 터진다고 막 난리칠 때였어요. 사실 저는 SK텔레콤팀이 아니었는데, SK텔레콤 담당 제작팀들에서 아이디어가 안 나오니까 제작 국장님께서 다른 생각을 듣자며 저한테 풀어보라고 했죠. 사실 제가 꼭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었으니까 상대적으로 부담이 없었어요. 차라리 한발 빠져 나와 꺼두라고 말하면 오히려 굉장히 고급스러운 접근이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꺼두라는 캠페인을 제안했더니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멋진 역발상이라고 했는데, 과연 광고주가 사주겠느냐가 문제였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많은 분들이 말도 안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SK텔레콤 부회장님인가 하는 분이 멋지다며 한번 해보자고 하셔서 나가게 됐고 그 후 011은 다른 브랜드와 격차가 확 났어요.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색다른 접근이었죠.
네. 파격적이었어요. 사실 아이디어를 내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죠. 사실 좋은 광고는 광고주가 만든다고 하잖아요. 광고주가 안 사면 끝이죠. 그것만 도와주고 빠졌는데 공은 다른 팀들이 다 가져가고, 저를 칸느에 보내주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저는 후배들에게 어떤 광고를 자기가 만들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그래요. 우리가 함께 만든 것이고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 것인데 그것을 굳이 자기 것이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는 대홍기획에서 광고를 시작하여 그동안 여러 광고회사를 거쳤는데, 광고 창작자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광고회사의 분위기나 철학에 따라 성과가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광고 창작자가 지닌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이나 일하는 광고회사와 절묘하게 궁합이 맞는 것에는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터이다. 이런 대목을 두고 운이 좋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 과정에서도 그는 성공한 광고를 자신의 업적으로 내새우기보다 침묵하는 쪽을 택했는데, 어쩌면 병아리 카피라이터 시절 누리기획에서 배웠던 정신의 아름다운 세계를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양보였으리라.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네요. 광고를 만들 때도 강한 판매 메시지보다 인생의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노력할 것 같은데요.

저는 골프를 잘 못 치지만 골프도 인간사도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어깨에 힘을 빼라고 하잖아요. 욕심을 부릴수록 조잡스러워지고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어요. 아트는 아트가 더 돋보이기를 바라고 카피는 카피가 더 돋보이기를 바라고 항상 그것 가지고 싸우잖아요. 저는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카피가 필요 없는 경우에는 쓰지 말라 그래요.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정쩡하게 하지 말고 서로 윈윈 할 수 있게 하라고 해요. 세상만사 모두 버릴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저희 집이 극장을 했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영화를 봤어요.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그림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잘 그리지도 못하지만 그림을 보는 눈이 본능적으로 쌓인 것 같아요. 느낌이 그냥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요. 그래서 글보다 그림에서 감동을 받을 때가 더 많고 말보다 그림이 더 솔직하다고 봐요.

 제가 어떤 곳에서 읽었는데 음악, 미술, 문학 같은 여러 예술장르 중에서 가장 강렬한 장르가 그림이랍니다. 그림의 강렬함을 글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말은 솔직히 솔직하지 않잖아요.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자신의 본의가 점점 모호해지는 경우도 많고요. 저는 글보다 그림에 가치를 두고 음악에도 글보다 가치를 더 두는 편이예요. 제 청춘의 한이 음악이나 그림을 잘 했으면 하는 것이었어요.

어린 시절에 영화를 많이 본 것이 상상력 발휘에 도움이 된다고 보시는지요?

김혜경 이사가 제작에 참여했던 광고들. 왼쪽으로부터 SK텔레콤 기업 광고와 삼성증권 FN아너스 클럽 광고.

글 쓰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저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재주밖에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책도 많이 읽고 책에 대한 욕심도 많지만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관심도 많아요. 제가 9남매의 막내인데, 음악 좋아하는 오빠도 있고 그림 좋아하는 언니도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어릴 때부터 팝송이나 클래식도 많이 듣고 영화도 많이 보고 해서 귀동냥과 음동냥으로 저도 모르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공부를 많이 안 해도 눈치로 남의 말 대충 알아듣는 순발력이 생겨 지금도 젊은 후배들하고 얘기할 때 멍청하지 않게 나름대로 따라가는 수준이죠.


그런 순발력이 뒷받침되면 앞으로도 아이디어 발상하는 데 끄떡없겠어요.

글쎄요.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광고를 참 싫어했어요. 도대체 이런 일이 무슨 가치가 있나 싶었는데, 오히려 요즘 와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광고가 단순히 물건을 파는 수단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문화라는 생각도 들어요. 제일 싫은 게 자기 욕심부리다 제 꾀에 넘어가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 말도 잘 들어주고 잘 키워주고 그래서 좋은 광고를 많이 만들어야 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란 사람들은 원래 기분과 자존심으로 먹고 살잖아요. 얼마나 자존심을 세워주느냐, 얼마나 기분을 북돋아주느냐가 중요하니까, 저 역시 후배들에게 그렇게 하려고 해요.

기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광고 말고도 훌륭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봉사나 기부 같은 것. 광고에 목을 매겠다고 거품을 품는 학생들을 보면 사람이란 다 그 나이에 맞게 생각이 여문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아직 20대로 한참 광고를 배울 때니까. 그는 이제 광고를 싫어하던 생각에서 벗어나 광고를 우리시대의 대중문화로 인식하고 예술과의 접목을 기대하는 듯하다. 광고가 예술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면 할수록 아릿한 예술적 향기가 더 그리워지지 않았던가. 그 역시 이런 맥락을 익히 체험했던 터라 다시금 광고의 예술적 교섭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광고 창의성과 일반적인 창의성은 분명히 다른 것 같습니다. 광고에서 창의성이란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광고 크리에이티브는 만드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만든다고들 오산하는데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데 속에 숨어있어서 현재 미처 깨닫지 못하는 부분들을 끄집어 내주면 사람들은 거기에 공감해서 좋아해요. 광고는 예술이 아니라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이잖아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데 저렇게 새롭게 이야기하네, 혹은 맞아 맞아 그랬었어, 하고 말할 때 훨씬 더 잘 받아들여요. 그래서 찾아서 놀랍게 전달하는 크리에이티브에게 박수를 보내요.

놀랍다는 그 무엇이 흔히 말하듯이 이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보여주는 것인지요?

아뇨. 이전에 없던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 같은 그런 것이죠.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간과했거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거요. 바나나는 노랗다고 생각하던 것을 확 깨버리는 발상이죠. 김지미 씨나 선동열 씨가 나왔던 금융광고에서는 모델이 좋기도 했지만 “나는 돈을 잘 모릅니다.” 그러잖아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돈 있는 사람들은 돈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은 돈을 알 필요가 없어요. 주위에 관리자가 있기 때문이죠. 훌륭한 집사나 컨설턴트를 두니까 사실은 돈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돈을 잘 모른다는 메시지에 사람들이 굉장히 놀라며 “그렇구나~.”하고 생각해요. 이렇게 고정관념을 확 깨는 역발상의 광고들이 좋아요. 괜히 멋 부리고 이상하게 기교부린 광고를 사람들이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오래 안 가요.

그러니까 겉치레를 없애고 색다르게 해석한 광고가 좋다는 말씀이시죠?

네. 요즘 트렌드가 자꾸 바뀌기는 하지만 칸느에 가서 느낀 것인데 영화도 그렇고 광고도 그렇고 점점 더 진솔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구나, 이런 식이죠. 사람들이 이제는 겉핥기식 광고의 실체를 알아버린 거예요. 진솔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되고 알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솔직하고 진솔하게 표현한 광고를 더 가치 있게 봐요.

광고물의 평가 기준이랄까, 어떤 준거에 따라 아이디어 리뷰를 하시는지요?

브랜드가 처한 상황이나 문제점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찾아내 거기에 가장 어울리는 틀을 적용해야죠. 예를 들어, 저희가 이번에 스카이 브랜드를 가져왔는데, 무조건 진솔하게 갈 순 없어요. 진솔하게 접근할지라도 툴(tool)은 달라야 해요. 아이디어 표현 방법은 아주 특이하게 할 수도 있고 애들이 좋아하는 형태로 만들어 낼 수도 있어요. 안에 들어 있는 핵심은 같다 치더라도 표현방법은 다양하게 해야죠. 매번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그때그때 브랜드가 처한 상황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가장 현명하게 해결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공감해요. 힘도 빼고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말로는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게 만만치 않잖아요.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셨는지요?

잘 모르겠어요. 그나마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요인은 마음을 조금 깨끗하게 가진 데 있지 않나 싶어요. 가능한 한 저를 백지상태로 만들려고 했는데, 제가 선입견이나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잣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다보면 남들은 인정하지 않는데 저만 좋아하는 그런 광고를 만들기 쉬워요. 그래서 늘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편견이 없어야 사람들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해요. 광고주 역시 마음이 맑은 사람들이 광고도 잘 보더라고요. 그러니까 광고 전문가들도 그런 마음으로 보면 광고가 잘 보이고 좋은 아이디어도 낼 수 있고 판단도 잘 할 수 있어요. 제 별명이 철딱서니인데, 편견 없이 순수한 마음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제 생각하고 맞는 것 같아요.

다양한 브랜드 접촉점에서 소비자와의 진솔한 인게이지먼트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한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약혼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지 않고는 절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없듯이, 브랜드에 대한 사랑의 방정식에서도 그 원리와 과정은 똑같으리라. 이런 맥락에서 그가 생각하는 광고 창의성의 개념은 ‘진솔한 이야기 만들기’이다.

괜히 멋있게 포장하고 이상하게 기교부린 메시지가 아니라, 겉치레를 없애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찾아내 진솔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광고 창의성의 진면목이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상품을 대하고 소비자를 대하는 순간에 생명력이 오래가는 솔직한 상품의 드라마가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때 광고 창작자들은 상품과 소비자 사이를 오가며 그 중매가 결혼으로 성사되도록 정성으로 보살피는 유능한 매파 역할을 해야 한다. 김혜경은, 늘 허허롭게 새 것만을 좇고 있는 우리 광고계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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